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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수 브랜드] 칠성사이다, 성씨 다른 7명이 만나 '칠성'

칠성사이다는 1950년 출시돼 올해 60년을 맞은 한국 최장수 탄산음료다. 일본에서 청량음료학을 전공한 박운석은 40년대 평양의 금강 사이다 공장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북한의 정정이 혼란스러워지자 평양에서 피복 공장을 하던 최금덕 등과 남한에서 사이다를 만들어 보기로 의기 투합했다. 이들 외에 월남한 실향민 4명과 충남 당진 출신 한 명 등 7명이 모였다. 50년 5월 9일 첫 제품인 칠성사이다가 생산됐다. 처음엔 주주로 참여한 7명의 성씨가 모두 다른 점에 착안해 칠성(七姓)으로 했다가 주주들의 단합과 회사의 번영을 바라는 뜻으로 북두칠성에서 이름을 딴 칠성(七星)으로 바꿨다. 깨끗한 물과 천연 향료.설탕.구연산 등을 적절히 배합하는 비율은 칠성사이다만의 노하우. 연구소와 생산 라인의 핵심 인력 몇 명만 정확한 배합 비율을 알고 있다. 동방청량음료에서 칠성음료공업(68년) 칠성한미음료(73년)를 거쳐 74년 롯데가 새 주인이 됐다. 하지만 브랜드와 배합 비율은 줄곧 그대로 유지됐다. 다른 탄산음료의 도전이 거세지자 80년대부터 칠성 사이다에 '3무'(무색소.무카페인.무인공향료)의 깨끗한 이미지를 입혔다. 롯데는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인 91년 칠성사이다 광고를 백두산에서 찍는 모험을 했다. 칠성사이다는 2004년 3400억원어치가 팔린 것을 정점으로 다소 매출이 줄었지만 지난해에도 여전히 2700억원어치가 팔렸다. 수많은 사이다 제품의 도전 속에서도 지난해 사이다 시장의 78%를 점유했다. 60년 동안 150억병 이상 팔렸다. 최지영 기자

2010-03-12

[장수 브랜드] 파리바게뜨의 '바게트'

1980년대는 단팥빵.소보루.크림빵 같이 단맛을 내는 빵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파리바게뜨는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달지 않아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프랑스 바게트가 주목을 끌 것으로 보고 85년 개발에 들어갔다. 빵 껍질의 바삭하면서 구수한 맛이 누룽지와 비슷해 한국 소비자들이 좋아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바게트는 호텔 베이커리만 소규모로 생산하고 있었다. 이를 대량 생산해 가맹점에 공급하려면 시간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원래 수분이 적은 빵이어서 구운 후 네 시간이 지나면 주위의 수분을 빨아들여 쭈글쭈글해지고 질겨져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초기엔 본사에서 구워 하루에 몇 번씩 트럭으로 여섯 곳의 가맹점에 날랐지만 대중화하기엔 물량이 부족했고 비용도 많이 들어갔다. 생각다 못한 파리바게뜨는 84년부터 식빵과 단팥빵 등 일부 빵에 적용하던 '휴면 생지' 기술을 도입해 보기로 했다. 빵을 굽기 전 발효한 반죽 단계에서 발효를 멈추게 한 후 이를 가맹점에 보내 직접 굽게 하는 방식이다. 바게트는 휴면 생지를 만드는 일이 다른 어떤 빵보다 힘들었다. 다른 빵과는 달리 설탕이나 크림.과일 같은 다른 재료의 도움 없이 밀가루.소금.이스트.물의 단순한 재료 네 가지만 섞어 맛있는 생지(밀가루 반죽)를 만들어야 했다. 또 생지를 만든 뒤에도 이를 냉동하고 해동하는 절묘한 온도와 습도를 알아내는 일이 난제였다. 겉과 속의 발효 정도가 달라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해진다는 점이 더 힘들었다. 당시 개발에 참여했던 이명구 부사장은 "수많은 생지를 만들었다가 냉동한 후 해동시켜 봤지만 온도와 습도가 맞지 않아 빵이 아닌 수제비가 돼 버리거나 속이 쫄깃하지 않고 겉은 눅눅한 빵이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회고했다. 영하 18도의 온도에서 생지를 급속 냉동한 다음 적정 온도와 습도에서 해동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86년 나온 바게트는 첫 해 한 달 1000여만원어치가 팔려 나갔다. 지난해엔 280억원어치가 팔렸다. 최지영 기자

2009-12-25

[장수 브랜드] 동국제약 마데카솔

'병풀'은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이 섬 주민들이 옛날부터 피부병과 한센병을 치료하는 민간 약재로 써왔다. 학명은 '센텔라 아시아티카'. 호랑이가 상처가 나면 풀더미에서 뒹굴었다고 해 '호랑이풀'로도 불린다. 동국제약의 상처치료제 '마데카솔'은 콜라겐 합성을 촉진하는 이 풀을 원료로 써서 마다가스카르 섬의 이름을 땄다. 동국제약이 1970년 프랑스 라로슈 나바론사(현재 로슈사)로부터 수입해 팔기 시작했다. 마데카솔이란 브랜드명도 그대로 썼다. 빨간색 소독제만 주로 바르던 시절 등장한 본격 상처 치료제였다. 제품력이 있다고 본 동국제약은 라로슈 나바론사와 협의해 제조법을 전수받아 78년부터 자체 생산에 들어갔다. 84년부터는 특허기간이 끝나 원료 추출에서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전 과정을 한국 기술로 한다. 하지만 95년 위기가 닥쳤다. 개발사인 라로슈 나바론사가 신텍스사에 인수되고 다시 로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새 주인인 로슈사와 마찰이 생겨 원료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된 것. 권동일(1938~2001) 당시 동국제약 회장은 원료확보팀을 마다가스카르에 급파했다. 그리고 이미 다국적 업체와 계약을 한 현지 상인들을 수소문해 한 달여간 설득 100톤의 원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부터 안정적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원료를 직접 공급받고 있다. 올 1월 농촌진흥청 김옥태 박사가 조직배양 기술을 써 병풀을 국내에서 시험 재배하는 데 성공 조만간 한국내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최지영 기자

2009-10-30

[한국 장수브랜드-12] 주방세제 '트리오'

애경 고 채몽인 창업주는 화장비누를 처음으로 내놓은 데 이어 세제도 생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전에 공장을 만들었다. 미국 유학 시절 화학을 전공한 부인 장영신 현 회장은 남편이 시장조사 때 들고 온 카탈로그와 팸플릿 제품설명들을 번역했고 자료 조사를 도왔다. 어려운 화학 관련 내용을 풀어서 남편에게 쉽게 설명해줬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66년 12월 국내 최초의 주방 세제 트리오가 출시됐다. 채소.과일.그릇 세 가지를 모두 씻을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이 '트리오'였는데 처음엔 세제로보다는 채소와 과일에 묻은 기생충을 없애준다며 인기를 끌었다. 한국기생충박멸협회의 추천품으로 선정돼 입소문이 더 났다. 하지만 일단 써본 주부들은 그릇의 기름기가 깨끗이 닦여 편리하다며 트리오를 카트에 담아 밀고 다니며 팔던 '써니 센터' 부녀사원을 찾았다. 80년대 말 트리오 광고 모델로 발탁된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CF콘티를 보더니 즉석에서 "인체에 무해한 세재라면 머리를 감아도 되겠네"라며 트리오로 머리를 감아 주변을 놀라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 현재의 트리오는 첫 제품과 이름 그리고 주방 세제라는 기능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제품이다. 아홉 차례나 리뉴얼했다. 최지영 기자

2009-07-19

[한인 장수브랜드-11] 하이트 맥주, '온도계 마크 보자' 소비자 열광

한때 40%였던 조선맥주의 시장점유율은 1990년대 들어 28%까지 추락하고 있었다. 쌉쌀한 유럽 정통 맥주를 만든다는 자부심은 강했지만 소비자들은 순한 맛을 선호했다. 이를 보완해 부드러운 '마일드'와 '수퍼드라이'를 내놨지만 재미를 못 봤다. 박문덕 현 회장이 사장으로 취임하고 조선맥주는 히트 상품을 못 내면 문을 닫아야 한다는 위기 의식 속에 92년 신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그해 5월 20여 명이 호텔방을 빌려 먹고 자며 연구에 들어갔다. 당시는 낙동강 페놀 사태가 벌어진 후여서 전주.마산공장이 깨끗한 물을 쓰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는 점을 차별화 포인트로 삼았다. 수십억원대의 추가 비용을 감수하고 일본에서 주로 쓰던 비열처리와 마이크로세라믹필터(MCF) 공정을 도입했다. 껍질을 완전히 제거한 맥아를 분쇄 발효시키는 드라이밀 공법으로 씁쓸한 맛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새 맥주에 걸맞은 이름으로 소비자 조사 결과 '라이브'가 꼽혔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등의 격론 끝에 소비자 선호도 2위였던 '하이트(사진)'란 이름으로 93년 5월 출시됐다. 처음엔 냉장고에 들어있지 않아 팔리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를 돌파하는 기회는 우연히 왔다. 실내에선 흰 티셔츠인데 햇볕을 받아 더워지면 무늬가 생기는 '시온잉크'를 쓴 티셔츠를 판촉물로 납품하려는 업자가 찾아왔다. 이에 아이디어를 얻어 시원해지면 온도계가 생기는 '온도계 마크'를 개발했다. 마크를 보려고 소비자들이 소매점에 하이트를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했다. 영업사원 역할을 소비자들이 해준 셈. 결국 96년 업계 1위에 올랐다. 하이트의 히트로 33년 창립 때부터 쓰던 회사 이름도 98년 하이트맥주로 바꿨다. 최지영 기자

2009-07-02

[한국 장수브랜드-10] 대상 순창고추장, 맛집 1000곳 고추장 분석해 '우리집 장맛' 재현

대상은 1986년부터 대기업 최초로 고추장 시장 진출을 모색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소비자에게 차별화를 주기 위해 고추장으로 유명한 지역에서 생산하기로 했다. 장 발효에 적당한 기후 조건을 갖췄고 물이 맑다고 소문난 전북 순창 자남리를 새 부지로 결정했다. 순창에 이미 있던 장류업체 '순창 임금님표'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개발에 속도를 냈다. 연구팀은 집 고추장처럼 처음부터 모든 재료를 섞어 발효해 재료들 간의 조화로운 맛을 추구하기로 했다. 메주를 발효하는 종균도 새로 찾기로 했다. 두 명이 조를 짜 전국의 고추장 맛 좋은 음식점을 돌았다. 유리병에 고추장을 얻어와 1000여 종균을 분석했다. 종균을 찾아 배양해 메주를 2~3일간 띄운 뒤 한 달을 기다려야 고추장이 나왔다. 균일한 맛을 내려고 고민 끝에 콩과 밀가루를 섞은 것에 직접 균을 넣었다. 합성 보존료 대신 주정을 넣어 보존제 역할을 하게 하는 것도 어려웠다. 너무 많이 넣으면 술 냄새가 났고 너무 적게 넣으면 곰팡이가 폈다. 2년여 연구 끝에 89년 1월 '순창 고추장'(사진)이 나왔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당시 입사 3년차였던 대상 안영후 장류담당 그룹장은 "합성 보존료를 쓰지 않은 고추장이 기온이 오르자 발효되며 여기저기서 터져 '고추장 폭탄을 파느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회고했다. 재료를 좀 더 균일하게 섞으면서 고추장 폭탄이 줄었다. 최지영 기자

2009-06-25

[한국 장수브랜드-8] LG 치약 '페리오'···하루 수십 번 '양치 테스트' 코 헐기도

1954년 출시된 럭키치약은 70년대 후반 들어오면서 독보적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입 자유화로 외국 치약이 밀려 들어왔고 소비자들의 눈높이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79년 중앙연구소를 대전 대덕에 만든 ㈜럭키는 이에 따라 신제품 치약의 개발에 들어갔다. 화장품과 함께 그룹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는 치약에 애정이 강했던 구자경 당시 그룹 회장은 직접 연구소를 찾아 "돈을 많이 벌려 하지 말고 혁신적인 제품을 내라"고 주문했다. 5명의 생활용품연구팀은 치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환자들 중 잇몸 질환을 앓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개발 방향을 잡았다. 지금까지 충치 예방에서 잇몸 질환 예방 쪽으로 가보자는 결정이 나왔다. 개발에 참여한 안호정(63) 전 LG생활건강 부사장(2002년 퇴사)은 "염증 억제와 지혈 기능이 있는 약효 성분을 찾는 데에만 1년 이상을 헤맸다"고 회고했다. 개별로는 약효가 좋아도 섞어 놓으면 색상이 변질되거나 약효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양치질 후 개운한 감을 주기 위해 10여 가지의 향 성분을 하나씩 첨가해 확인해 봤다. 소비자 조사를 거쳐 미국 중부 지역의 천연 페퍼민트 향을 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어려움은 알루미늄 튜브를 라미네이트 튜브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왔다. 알루미늄 튜브를 가정하고 만든 치약 성분이 라미네이트 안에 들어가니 안정성과 맛이 달라져 버려 성분 배합을 다시 해야 했다. 연마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치과에서 버리는 이를 모아다가 붙여 연마력 측정 기계도 만들었다. 서울대 치대와 6개월간 임상시험까지 하다 보니 개발 기간은 2년을 넘겼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수억원이 연구 개발비로 들어갔다. 당시 ㈜럭키 전체의 연간 순이익이 30억원 선이었다. 라미네이트 튜브를 만드는 설비에만 10억원이 따로 들어갔다. 마음이 다급해진 연구원들이 하루에 수십 번씩 양치질을 하느라 강한 민트향에 코가 헐기도 했다. 진통 끝에 81년 출시된 것이 '페리오(Perioe)'다. 국내 최초의 잇몸질환 예방용이라는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잇몸의'라는 의미의 의학용어 'periodontal'에서 이름을 땄다. 지금까지 약 10억7000만 개(150g 기준)가 팔려 나가 국민 한 사람당 22개를 썼다. 한때 40%에 달하던 시장 점유율이 25%대까지 떨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현재는 페리오덴탈쿨링시스템 등 7종이 팔리고 있다. 최지영 기자

2009-06-16

[한국 장수브랜드-7] 아가방, '아기 머리가 안 들어가네'

1977년 대우실업의 이란 테헤란 지점장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김욱(66) 현 아가방앤컴퍼니 회장은 의아함을 느꼈다. 업무상 해외 근무가 많았던 그에게 유아용품과 유아옷 전문 매장이 없는 한국내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만 세 살과 두 살이었던 딸들에게 옷을 사주려면 재래시장을 뒤져야 했다. 1년 뒤 태어난 셋째 딸의 배냇저고리는 원단 가게에서 천을 떼다가 직접 만들어 줘야 했다. 이불과 요 역시 침구 매장과 재래 시장에서 따로따로 구입하는 수고를 거쳐야 했다. 젖병은 약국에서 파는 수입 젖병이 아니면 정식 수입 절차를 거치지 않고 들어온 젖병을 구해다 써야 했다. 김 회장은 이런 현실이 오히려 사업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아기용품 개발에 나섰다. 브랜드 이름은 창업 주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아가방'으로 짓기로 했다. 순 한글로 기억하기 쉬운 데다 아가의 모든 것을 취급하는 매장이라는 의미가 잘 전달된다며 다들 무릎을 쳤다. 하지만 아기용품의 종류가 워낙 다양한 데다 한국 기술로는 개발할 수 없어 일단 유명 수입 업체인 이탈리아 치코와 수입 계약을 한 뒤 79년 4월 아가방을 선보였다. 그러고는 하나 둘씩 치코의 제품을 벤치마킹해 한국화에 나섰다. 한국 아이들의 체형에 맞추는게 시급했다. 한국 아기들은 서양 아기에 비해 머리가 더 컸고 팔다리도 더 통통했다. 월령이 적은 아기 옷은 전체 사이즈에 비해 머리 사이즈는 커야 한다는 사실조차 잘 파악되지 않았다. 30년 전 직원들은 자녀와 조카 등을 총동원 가봉 과정 등을 통해 한국 아이 체형에 맞는 사이즈를 정해나갔다. 다음 난관은 제품 종류가 워낙 다양해 하청업체를 찾는 일. 양말 공장과 모자 공장 단추.지퍼 등 부자재 전문 소싱 업체들을 따로 수소문했다. 이렇게 조금씩 한국화를 시작해 수입하던 의류와 젖병의 한국화를 82년에 마쳤다. 최지영 기자

2009-06-11

[한국 장수브랜드-7] 피죤 섬유 유연제, 처음 내놨을 땐 '머리 감아도 되나요'

㈜피죤 이윤재 회장은 1970년대 동남합성이란 화학회사에서 근무하며 출장을 다니던 중 선진국에 있던 섬유 유연제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그때는 한국 주부들이 빨랫비누를 쓰고 손방망이질을 해 옷을 빨던 시절. 세탁기는 최고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 국내에서도 섬유 유연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피죤 김달영(2000년 부회장으로 퇴사) 고문은 "정전기를 방지하면서 옷감을 유연하게 하고 동시에 피부에 자극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이 골칫거리였다"고 회고했다. 5~6가지 핵심 성분을 이렇게도 섞어보고 저렇게도 섞어봤지만 한 가지를 만족시키면 다른 점이 미흡했다. 연구원들이 테스트 샘플을 개발하면 직원들이 총동원돼 집에 갖고 갔다. 부인들이 여름 모시옷부터 겨울 스웨터까지 각종 빨랫감에 제품을 풀어 성능을 시험한 뒤 남편들에게 알려줬다. 향은 외국에서 수입했는데 테스트 끝에 은은한 잔향이 남는 '비앙카 향'으로 결정했다. 1년여간의 우여곡절 끝에 피죤(사진)이 78년 12월 세상에 나왔다. 연구팀을 이끌고 새 회사를 만든 이 회장은 홍익대 한도령 학장팀과 함께 회사명과 브랜드명을 '피죤'으로 통일하고 CI(기업 이미지 통합) 작업을 했다. 명동 미도파 백화점의 유리로 덮은 진열장에 제품을 '모셔놓는' 명품 마케팅도 벌였다. 7년 동안 주부들에게 1t 트럭 1200대 분량의 무료 샘플을 뿌렸다. 출시 이후 용도를 모르는 소비자들의 좌충우돌이 이어졌다. 압권은 "머리카락 정전기가 심한데 이걸로 머리를 감아도 되나요"라는 문의 전화였다. 여대생들 사이에서 '피죤 하면 치마가 스타킹에 달라붙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제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주부들 사이에선 '피죤 한다'는 말은 '빨래에 섬유 유연제를 넣는다'는 말로 통하기 시작했다. 2004년 단일 생활용품으로는 처음으로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고 31년 동안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가구당 1년에 약 3개(1.5L기준)씩 쓴다. 최지영 기자

2009-05-27

[한국 장수브랜드-6] CJ제일제당 다시다, 국물 맛있다는 식당 다 돌아 3년 만에 '그래, 이 맛이야'

국물 맛이 좋다고 소문난 한식집은 다 돌아다녔다. 종업원들에겐 팁을 찔러주고 육수를 주전자에 얻어 왔다. 그렇게 발품 팔며 시장조사에만 2년, 제품 개발에 1년 넘게 걸렸다. 1975년 11월 다시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사원으로 개발에 참여한 문동상 전 CJ제일제당 상무(2000년 퇴직)의 술회다. 70년대 주로 쓰이던 조미료는 ‘발효 조미료’(당시 미원이 부동의 1위)였다. 제일제당(지금의 CJ제일제당)은 72년 천연조미료 개발에 착수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따라가려 하지 말고 천연 재료로 건강지향적인 걸 개발해 보라”는 특명에 따른 조치였다. 그때엔 몇 대 없었던 ‘아미노산 분석기’로 맛 좋은 국물의 아미노산 함량을 분석했다. 어떤 재료를 써 국물 맛을 내는지도 꼼꼼히 조사했다. 일본에서 가쓰오부시(가다랑어 포)로 만든 조미료 혼다시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인들이 좋아하지만 쉽사리 먹을 수 없는 것이 쇠고기인 점에 착안해 주재료는 쇠고기와 가다랑어 두 가지로 정했다. 하지만 화학 조미료 비율을 10%로 줄이면서 감칠맛을 내는 것이 문제였다. 양파·무·마늘·버섯 같은 양념들이 열쇠였다. 시행착오 끝에 달큰하면서 매운 무를 적당 비율로 쓰면 쇠고기 맛이 증폭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쇠고기로만 만들면 원가가 너무 비싸 사골 농축액과 섞기로 했다. 생선 맛 다시다엔 일본 가쓰오부시와 달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마늘을 넣어 비린내와 단맛을 줄였다. 하지만 맛에 주안점을 둬서 만들고 보니 시꺼먼 색깔이 혐오감을 줬다. 주재료인 간장이 검은색인 데다 마늘에 열을 가하면 갈색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수많은 실험 끝에 간장의 짙은 색깔을 탈색해 옅게 만들고, 마늘은 저온 건조해 분말로 만들었다. 다시다는 지금도 가정용 조미료 시장에서 8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누적 매출액이 3조8000억원. 346억8000만 그릇의 찌개와 국에 다시다가 쓰였다. 최초의 쇠고기와 생선(가다랑어) 두 종류에서 80년대엔 멸치·청국장·냉면·된장·곰탕·매운탕·조개 등으로 다변화했다. 그러다가 쇠고기와 멸치, 해물, 조개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생소한 천연 조미료 제품을 알리기 위해 시식 버스가 동원됐다. TBC라디오와 연계한 판촉 캠페인이었다. 라디오 광고로 다시다 시식 버스가 가는 곳을 알려주다 보니 극성스러운 주부들은 라디오를 듣고 택시로 쫓아오기도 했다. 최지영 기자

2009-05-11

[한국 장수브랜드-5] 야쿠르트, '균을 사 먹으라니···' 한때 곤혹

"뭐? 균을 돈 주고 사먹으라니 무슨 미친 소리야." 1971년 8월 출시된 요구르트(사진)를 접한 사람들은 이렇게 화를 냈다. 한국야쿠르트는 생각다 못해 사람들을 모아 버스에 태워 경기도 의왕에 있는 공장으로 데려갔다. 이곳에서 이들에게 발효유를 나눠준 뒤 유산균의 유익함을 알리는 홍보 영상을 틀어줬다. 1기로 이 회사에 입사한 김순무 부회장은 "유산균이 장 속에서 증식하며 나쁜 균을 없앤다는 내용의 영상을 본 사람들은 엄청나게 놀랐고 일부는 토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유산균의 좋은 점이 입소문이 나 요구르트가 인기를 끌기까지는 그로부터 2년이 넘게 걸렸다. 이 회사 백영진 고문은 "그후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를 스스로 고치고 설비를 추가해 3교대로 24시간을 돌렸다"고 말했다. 원료인 탈지분유가 부족해 남대문시장에서 1㎏짜리 포대 분유를 부랴부랴 구해 쓴 일도 있었다. 국내 최초의 유산균 음료 요구르트의 탄생은 종균 그리고 온도와의 싸움이었다. 건국대 축산대학장이었던 한국야쿠르트 초대 사장 고 윤쾌병(1923~2000) 박사는 일본 니혼대 농수의학부를 졸업해 일본과 인연이 많았다. 친분이 있던 시로다 미노루(1899~1982) 박사가 개발한 유산균을 이용해 만든 요구르트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윤 박사는 "유산균 발효유를 한국에도 보급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일본야쿠르트 회장을 맡고 있던 시로다 박사를 설득했다. 자본금은 친척인 윤덕병 창업주가 댔다. 일본에서 유산균 종균을 공급받는 대가로 지분 38.3%를 넘기는 합작 계약을 70년 맺고 직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하우를 배워왔다. 유산균 종균을 들여와 10~12배로 배양해 물을 섞는 방식이었다. 보통 발효유는 최장 12시간 발효하면 되지만 요구르트는 72시간 넘게 중간에 온도를 바꿔주면서 발효해야 했다. 연구원 15~16명이 매일 밤 균주와 씨름했다. 종균을 7~8개월에서 1년 정도 쓰면 활력이 떨어져 다시 들여와야 했다. 이후 81년 자체 기술로 종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최지영 기자

2009-04-29

[한국 장수브랜드-4] 해태 부라보콘, 바삭바삭한 콘 만드는데 1년

지금 40대 후반 이상은 코흘리개 어릴 적 동네에서 아이스케키 장수를 자주 접한 세대다. 동네에서 말뚝박기나 다방구 같은 놀이를 하다가 “아이스케키 사려∼” 하고 외치는 아이스케키 아저씨를 볼라치면 입맛을 다시면서 주머니 속 동전을 세어 보곤 했다. 지금이야 아이스케키가 아닌 아이스크림이 지천으로 깔려 있지만 그 당시엔 우리나라에 아이스크림이 없었다. 그때가 1970년 이전이었다. 시계를 40년 전으로 돌린 69년. 해태제과 진홍승(68) 박사(94년 퇴사)는 회사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하드 형태의 ‘아이스케키’가 아닌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덴마크와 독일·스위스 등 낙농 선진국을 석 달간 돌아다녔다. 그러고는 큰돈을 주고 덴마크 호이어사로부터 아이스크림 생산 설비를 도입했다. 하지만 설비만 들여왔다고 아이스크림이 “옛따” 하고 나오진 않았다. 우선 재료를 안정적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유에 탈지분유를 첨가해야 했는데, 탈지분유를 제대로 만드는 곳이 없었다. 암시장에서 구한 미군부대 탈지분유를 협력사에 들고 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덴마크 사람들이 먹는 아이스크림 콘은 초콜릿과 아몬드를 입힌 고급 제품. 하지만 국내에선 사람들이 사먹을 수 있을 수준으로 원가를 맞춰야 해 초콜릿을 쓰지 않고 땅콩을 아몬드 대신 뿌리기로 했다. 남대문시장을 뒤져 땅콩 공급자를 찾아냈다. 담배 포장지를 만드는 회사와 머리를 맞대고 물기가 스며들지 않는 뿔 모양의 은박지 포장지를 어렵사리 완성했다. 수백 번 배합을 달리해 뿔 형태의 콘 과자를 만들어 봤지만 모양과 크기가 만들 때마다 제각각이었다. 더 큰 난관은 아이스크림을 콘에 넣고 난 이후였다. 아이스크림의 습기 때문에 콘이 금방 눅눅해져 버렸다. 1년여에 걸친 실험 끝에 콘 과자에 들어간 설탕과 물엿의 배합을 맞춰 쉽게 눅눅해지지 않는 콘을 만들었다. 여기에 딱 맞는 온도의 아이스크림을 콘에 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영하 7도~영상 1도 사이의 아이스크림(정확히 몇 도짜리를 넣는지는 비밀이다)을 콘에 넣은 다음 급속 냉각 터널에 통과시켜 냉각했다. 마침내 70년 4월 ‘부라보콘(사진)’이 완성됐다. 어렵사리 세상에 나온 부라보콘을 유통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냉장 유통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진 박사는 “부라보콘 40~50개가 들어가는 유리로 된 보온병을 만들어 얼음을 채우고 소금을 뿌려 소매점에 공급했다”고 회고했다. 출시 초기 부라보콘의 인기에 도매상들이 해태공장 앞에 진을 쳐 공장 출입문을 봉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최지영 기자

2009-04-21

[한국 장수브랜드-3] 오리온 초코파이, 최적의 촉촉함 찾아내는데 1년

지금이야 초콜릿 과자가 널려 있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가 보다. 1973년 미국 조지아주. 오리온의 김용찬 과자개발팀장(90년 퇴사)은 출장길에 들른 한 호텔 카페에서 초콜릿을 입힌 과자를 먹어 보고 적잖이 놀랐다. “이거 신기한데…. 우리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국내로 돌아온 그는 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배합을 달리 해 수백 번 구워 봤지만 비스킷이 타거나 너무 부풀어 애를 먹었다. 또 비스킷에 마시멜로를 얹은 다음 초콜릿을 덮었더니 마시멜로의 습기를 머금은 과자가 너무 물렁해져 과자가 내려앉아 버렸다. 실험은 1년여간 계속됐다. 결국 알아낸 비밀은 이랬다. 우선 구울 때 열풍·가스직화·간접복사열, 세 가지 방식을 조합했다. 그러고는 생케이크처럼 촉촉한 맛을 혀끝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12%의 수분 함량이 최적이란 사실을 찾아냈다. 비스킷을 딱딱하게 만든 뒤 이를 숙성 창고로 옮겨 적당한 수분과 습도를 맞춘 상태에서 사흘간 숙성시켰다. 그 결과 딱딱한 비스킷이 마시멜로 덕분에 적당히 촉촉해진 초코케이크가 74년 태어났다. ‘초코파이’의 탄생 비화다. 초코파이는 지금 세계 과자가 됐다. 90년대 중반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사가지고 나간 초코파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회사가 본격적으로 수출에 나섰다. 지난해 매출 2176억원 중 33%만 한국에서, 나머지는 해외에서 올렸다. 출시 이후 국내에서 줄곧 초코케이크류 중 1위며 중국에서 60%, 베트남 51%, 러시아 42%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지난해 기준). 오리온 연구소 파이개발팀의 문영복 팀장은 해외 공장 6곳에서 만든 초코파이를 특송으로 받아 수시로 먹어본다. 초코파이는 기본 배합 90%는 똑같이 하고 10%를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게 만든다. 베트남에선 더운 날씨를 고려해 잘 녹지 않는 초콜릿을 쓴다. 단맛을 선호하는 러시아인들에겐 좀 더 달게 만들고 초콜릿 양도 늘렸다. 상표등록을 ‘초코파이’로 하지 않고 ‘오리온 초코파이’로 한 것은 한때 위기를 불렀다. ‘OO 초코파이’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한 것. ‘그만하면 오래 팔았다, 안락사시키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89년 추억을 강조한 ‘초코파이 정(情) 시리즈’ 광고의 히트로 브랜드를 이어가고 있다. 최지영 기자

2009-04-14

[한국 장수브랜드-2] 농심 신라면, 4명이 열달 간 하루 6그릇씩 맛보며 개발

“‘辛라면(사진)’으로 하지.” 1986년 농심 신춘호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얼마 전 경쟁회사에서 사람의 성(姓)을 딴 라면을 내놨다가 문중의 항의를 받고 제품을 중단한 적이 있었기 때문. 또 마케팅 담당자들은 “오너의 성을 딴 라면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며 말렸다. 그러나 신 회장은 “우린 ‘매울 신’ 아닌가”라며 밀어붙였다. 당시 신참 연구원으로 신라면 개발에 참여했던 농심 최호덕(49) 연구개발실 부장은 그해를 쉴 새 없이 라면 국물과 면을 먹으며 보냈다. 10.5g, 한 숟갈 분량의 스프에 어떻게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 맛을 담을 것인가가 숙제였다. 매운 맛이 너무 날카로워도 안 되고 단맛과 구수한 맛이 조화를 이뤄야 했다. 청양고추는 맛이 너무 강해 제쳐놨다. 산지와 생산 시기, 건조 방법이 다른 20여 종의 고추를 다 실험했다. 그냥 고춧가루로만 만들면 텁텁했다. 고민 끝에 육개장 고춧가루를 기름에 볶는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볶은 고춧가루와 그냥 고춧가루, 그리고 고추를 직접 농축시켜 만든 농축 엑기스 3가지를 섞어 입에 착 붙는 배합의 매운 맛을 찾았다. 라면 하면 지방과 탄수화물만 많다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쇠고기를 이용해 국물을 내기로 했다. 면발도 쫄깃한 식감을 위해 기존의 사각형에서 원형으로 바꿨다. 연구원 4명이 하루 30여 회, 한 번 먹을 때 5분의 1 그릇을 시식하는 과정 끝에 그해 10월 신라면이 태어났다. 된장과 간장 맛이 주였던 라면시장에 첫 등장한 매운 맛 라면이었다. 난관은 또 있었다. 식품위생법에 제품 명으로 한자나 외래어를 쓸 경우 한글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이에 농심은 ‘辛’자를 크게 쓰게 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를 거듭했고, 이듬해 규정 변경까지 이끌어냈다. 소비자들의 입맛은 세월 따라 변한다. 농심 이정근 마케팅 팀장은 “1000여 명의 모니터 요원에게 수시로 의견을 물어 몇 년에 한 번씩 배합을 미세하게 조정한다”고 공개했다. 86년 당시 만들어졌던 것보다 지금의 신라면 맛이 전체적으로 진해졌다고 한다. 외환위기 때 매운 맛의 강도를 눈에 띄게 높인 적이 있다.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더 매운 맛을 찾는 소비자들 때문이었다. 10년 만에 닥친 이번 불황에 또 한번 매운 맛을 높여야 할지를 놓고 고심 중이다. 신라면은 출시된 뒤 88년부터 21년 동안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180억 봉지가 팔렸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에베레스트를 18만6483번 왕복하는 양이다. 국내에선 지난해 37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도 매출이 10% 늘어날 전망이다. 70여 개국에 수출도 한다. 최지영 기자

2009-04-13

[한국 장수브랜드-1] 동아약품 활명수, 80억 병 팔린 '112세 소화제'

‘아스피린과 동갑, 올해 나이 112세’. 장수 브랜드 이야기 코너의 첫 테이프는 국내에서 가장 장수한 브랜드로 끊어야 할 것 같다. 오래됐을 뿐 아니라 현재도 전체 소화제 시장 점유율 50%로 굳건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연평균 매출이 10%씩 늘고 있다. 동화약품의 ‘활명수’ 얘기다. 지금까지 팔린 활명수는 80억 병. 가로로 눕혀 길이를 재보면 지구를 24바퀴 돌 수 있다. 활명수는 1897년 처음 생산됐다. 국내 최초의 등록상표(부채표)와 등록상품이란 기네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고종 황제 시절 궁중 선전관(요즘의 경호실장)으로 있던 민병호 선생이 전의들과 가까이 지내다 궁중 비방을 알아냈다. 여기에 외국 원료를 추가로 넣어 11가지 생약 성분으로 만들었다. 병에 넣어 휴대하기 쉽게 한 것이 획기적이었다. 당시엔 정말 배탈로 죽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물’이란 이름이 실감났다. 활명수 스토리는 조만간 책으로도 나올 예정이다. 한양대 경영학부 예종석 교수가 이달 중 『활명수 경영학-한국 마케팅 111년의 역사』(가칭)를 탈고한다. 국내에서 단일 제품의 성공과 장수비결을 분석한 책은 이번이 처음. 그만큼 활명수의 상징성과 중요성이 남다르다는 게 예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활명수 브랜드의 성공은 제품의 신비로운 스토리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를 갖고 있는 제품이란 점도 성공 이유다. 만주에까지 독자적인 유통망이 있었고, 전국에서 경품 잔치를 벌이는 등 마케팅 기법도 당시로선 선구적이었다. 활명수의 또 다른 장수 비결은 끊임없는 개선이다. 변하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맞춰 60년 이후에만 다섯번 처방을 바꿨다. 병 디자인도 변신을 계속했다. 지난달 초 12년 만에 포장을 바꿨다. 1910년대 60mL 활명수 한 병의 값은 50전.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두세 잔을 사먹을 수 있는 비싼 가격이었다. 60년대엔 진로소주 영업판촉팀이 퍼뜨린 ‘활명수 칵테일’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활명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대표적인 게 65년 라이벌 ‘까스 명수’의 등장이었다. 삼성 제약이 청량음료를 벤치마킹해 생약 성분에 탄산가스를 첨가해 내놨다. 67년 동화약품은 이에 대항해 기존의 활명수에 탄산가스를 넣은 ‘까스 활명수’를 내놨다. 활명수의 지난해 매출은 400억원. 동화약품 전체 매출의 22.8%를 올려주고 있는 효자 상품이다. 최지영 기자

200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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